〈

〉

。 、 、 。

。

、

。

、

、

、

。

、

、

。

、

。

。

、

、

。

、

。

나는 지난

2003

( 년 월 오키섬

5

隱岐 )

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오키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시

.

( 마네현

島根縣

) 에 속해 있으며 우리나라 동해안을 마주보고 있는 도서지역이다 보다 정확

.

하게 말한다면 북위 도 동경

36 ,

133

도에서

133

도 분 사이에 위치한 개의 섬으로 구성

20

4

되어있다 그것을 또 두 개로 나누어

.

島前 島後 과

로 구분하는데 즉

,

知夫里島 西島 中島

,

,

를

島前

이라 하고 그곳에서 다시 북동쪽으로 약 키로 정도 떨어진 큰 섬을

13

,

島後라고 한다.

島前 島後 과

를 모두 합하여 총면적이

345,97

평방 키로 정도이고 일본해에 떠 있는 섬 가

,

운데

佐島

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총인구

26,000

여명 정도 살고 있다

.

)古事記 ( 그곳을 찾은 이유는 당시 나는 고사기

의 설화 중 오키에 사는 흰토끼가 상어들

을 속여 일본 본토로 건너갔다는 이야기에 몰두해 있었다 따라서 그 현장을 꼭 한번 확인

.

하고 싶었다.1) 특히 그 설화는 일본에서는 초등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이야기인데 그와 똑같은 설화가 우리나라에서는 여수의 오동도에서 전하여 지고 있

,

다 그러므로 그 설화의 전파경로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오키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서 의외의 사람을 만났다 그가 바로 콘도오 타케시

.

近藤武 ( )

씨였다 그

.

는 세가 훨씬 넘은 고령의 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토민요에 대한 열의가 대단

70

.

하여 채집 조사하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연구하여 일본민속음악학회에서 발표를 해

나가는 그야말로 정열적인 노인이었다 그러한 그가 나의 숙소에 조심스럽게 찾아와 노래자

.

료를 보여주며 가사 가운데 자신들도 모르는 말이 너무 많이 나오는데 어쩌면 그것들이 고

대 한국어가 아닐까 하며 그 사실여부를 나에게 물으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언어학자가 아

.

닌 나로서는 그 자료를 받아서 숙소에서 몇 번인가 읽어보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

. 다 하는 수 없이 그에게 훗날을 기약하고 참고하기 위해 그 자료의 출처에 대해 물었다

.

그러자 그는

伊末自由來記

라는 문헌을 소개해주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그 문헌은 오키

.

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며 자신이 그 복사본을 가지고 있으며 연구를 위해서라면 그것을

나에게 빌려 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복사본을 한국에 가지고 와서 다시 복사를 했고

.

,

. 그에게 빌린 것은 우편으로 돌려주었다

현재

伊末自由來記

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콘도오씨가 복사해준 복사본의 겉 표지에는 서명과 함께

.

「

永亨辛亥三年霜月持福寺隱

居一閑」

이라는 기록연도와 기록자의 이름이 보이고 또 지복사라는 사찰의 낙관이 찍혀져

,

永亨 ( 있다 영형 .

) 3

년이란

1431

, 년을 말하고 지복사는

都万村

에 있는 불교사찰이며

,

一閑

은

당시 그 절의 주지였다 이러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문헌은

.

1431

년 아시카가시대

足利時代 (

)

지복사의 주지 일한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문헌은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

570

여년 전의 문헌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원본은 모두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었

.

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내가 받은 복사본은 한문으로 되어있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

.

그 내용을 누가 일본어로 번역해놓은 것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

.

다.

콘도우씨에 의하면

1910 ( 년

明治 年

43 ) 11

월 초순

都万村 新屋敷

에 사는

安部廉一

이라는

노인이 평소에 잘 알고 있는

金坂亮

씨를 찾아와

伊末自由來記

를 보여주었다 한다 그러자

.

한문을 해독할 줄 알았던

金坂

씨가 그 자리에서 내용을 풀어서 전보를 칠 때 사용하는 종이

의 뒤에다 연필로 기록해두었다 그 후

.

金坂

씨는 오사카로 이사하여 살다가

, 1950

년 자신의

고향인

五箇村

자택으로 돌아와 그 동안 방치해두었던 창고를 청소를 하다가 예전에 자신이

해독하여 두었던

伊末自由來記

를 찾아내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마지막 부분 분의

3

.

1

가량의 기록이 분실되고 만 상태이었다.2) 그 이후

伊末自由來記

는

金坂亮

씨의 장남

金坂

俊夫

씨에 의해 보존되어오다가 최근 그의 친지인

西鄕町

에 사는

石田豊彦

씨의 소개로 민요

연구가인 콘도오씨에게 전해졌고 다시 그에 의해 복사본으로 나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

,

다 나는 귀국한 뒤 좀처럼 읽을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최근에 차근차근 읽어보고는 깜짝

.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것에는 내가 미처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역사가 숨어 있었기 때

.

문이다 특히 그 역사는 오키와 한국과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사실들이었다 내가

.

.

알기로는 그러한 내용들은 일본에서는 지역 향토사학가3)들에 의해 조금씩 일반인들에게 알

려지고는 있다 하나 일반화된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학계에서는 전혀 소개된

,

바가 없는 새로운 사실들이었다 문헌에 대한 고증하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먼저 그 내용을

,

.

소개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라는 생각 끝에 이번 기회를 통하여

伊未自由來記

속에 나타

나 있는 한국인과 한국어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작업은 동해와 일본해를 사

.

이에 두고 한일 간 교류의 역사를 밝히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어지기 때문이

다.

伊未自由來記

는

木葉人

의 이주전승과 민요,

阿麻 山祗 大人樣 美豆別之主命 奈賀命

,

,

,

,

,

國造

등의 단원으로 구성되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 한국인과 한국어와 관련이 있는 부분은

.

맨 처음에 나오는

木葉人

에 관한 이주전승과 그들이 남긴 민요 그리고 신공황후전승이다.

그 중 신공황후전승은 신공이라는 일본의 왕녀가 신라를 정벌하였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비.

록 그 내용이 한국과 관련이 있다 하나 그녀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며 또 그것을 역

,

사적 사실로 보기 힘들기 때문에 일단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

伊未自由來記

는

오키에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木葉人

이라고 했다 그들은 훗날 일본 본토에서 들어온

.

阿

麻族

들과 함께 어울려 오키섬을 개척하였으며 나중에는 그들의 문화에 동화된 것으로 서술

,

하고 있다 그러한 목엽인이 오키에 이주하는 전승을

.

伊未自由來記

는 자세히 서술하고 있

. 는데 그 내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이상의 기록을 보면 최초의 오키섬의 정주민은

木葉人

이었다 그들이 맨 처음 정착한 곳

.

은

島後 主栖 의

이었고 짐승의 가죽과 나무의 잎과 껍질로 옷을 해 입었기 때문에 그러한

,

이름이 붙여졌으며 또 그들은 불을 지피고 낚시도구를 이용할 줄 알았으며 또 그들의 이

.

,

주는 한차례가 아닌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주로

,

主栖 船越 와

에 정착촌을 이루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

伊未自由來記

에서는 그들의 고향을

「

」 加羅斯呂觸

또는

「 韓

의

除羅國」

라고 불리우는 서쪽 천리정도 떨어진 곳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고향으로 지목했던

「

「 또는 의 」 韓 除羅國 加羅斯呂觸

」

는 과연 어디일까?

「

加羅

「 」 韓」

와

은 일본어로 카라 라고 발음되는 것으로 재야의 고대 언어학자인 박병식은 가

「

」

야를 나타내는 말로서 해석하고

伊未自由來記

에서 그렇게 표기한 것은 신라가 가야의 속

국으로 있었던 역사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했다.5)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고

」 加羅 「

또는

「 」 韓

은 한반도를 나타내는 말로 해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카라 라는 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한반도의 고대국가인 가야에서 한반도

「

」

.

를 그리고 나중에는 중국을 포함한 외국을 지칭하는 말로 변화되어가며 또 가야가 신라를

,

,

지배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오키에 올 수 있는

,

한반도지역은 신라가 위치한 동해안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

加羅斯「

」 呂觸

는 한반도에 있는

「

」 斯呂觸

으로 해석하고 또

,

「

韓 除羅國

의

」

도 한반도에 있는 제라국

「

」 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

斯呂觸 ( ) 사로촉

」

중 사려 는 시로 또는 사로 로 발음되고 한편 촉 은 후루 라고

「 」

」

「

」

」

「

「

」

「

,

발음되기 때문에 이를 모두 합하면 시로후루 또는 사로후루 가 되는데 이는 곧 신라의

」

「

」

「

,

서울 서라벌 로 추정하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한편

「

」

.

「

除羅國

」

도 신라를 나타내는 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일본어로 발음하면 죠라국 이 되는데 그와 유사한 발음이 나는 한

」

「

,

.

반도의 동해안에 위치한 고대국가 가운데 신라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키섬에서 가장

.

가까운 외국 땅이 우리나라의 동해안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목엽인의 고향으로 지

목한

」 加羅斯呂觸 「

또는

「

韓 除羅國

의

」

( 는 사로국

斯盧國

) 으로 일컬어지는 신라를 가리키는

말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다시 말하면 오키섬에 처음으로 정착한 목엽인은 다름 아닌

.

신라인이었던 것이다.

伊未自由來記

는 목엽인이 전했다고 하는 민요 개가 기록되어있다 콘도오씨에 의하면

3

.

그 민요가 오키섬에서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그것들은 목엽인들이 경단을 만들 때

,

불렀던 노래라고 한다 그런데 그 노래의 가사가 난해하여 지역사람들도 그 내용을 모르는

.

부분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콘도오씨는 이를 고대한국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추정했

.

다.

그의 말이 묘한 설득력을 가지는 것도 그것을 전하였다고 하는

木葉人

이 신라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라면 그 속에 나오는 단어 가운데 한국어가 섞여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래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의미가 불분명한 가사들을

.

한국어로 풀이하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언어학이 아닌 민속학을 전공하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를 보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는 오키의 방언까지 이해

.

해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불가능해 보였다 이러한 나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콘도우씨가 노

.

.

래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협력을 해주기로 했고 나는 또 여기에 힘입어 세 개의 민요를 한

,

국어와 오키의 방언으로 풀이하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노래인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럼 먼저 절구의 노래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伊未自由來記

에 의하면 이 노래는 읍장

(

邑長

)

, 의 집안에서만 전해지는 특별한 노래이며 또한 난해해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가 매

우 힘들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일단 의미가 불분명한 말들을 카타카나로 표기한 후 그것에

.

대해 한국어와 오키의 방언으로 풀이했다.

、

モクノシ ( 모쿠노시 이 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나무의 열매

):

.

라는 의미의 한국어로 보고 의 열매 로 해석하는 것이고

種 )

木

(

  1. 또 다른 하나는 오 ,

키에 자생하는 모쿠로지라는 나무라는 해석이다 오키의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모쿠

.

로지의 열매는 도토리 크기만 하고 둥글고 황색 표피에 사인 검은 색깔의 열매라고

,

한다 그 껍질을 문지르면 거품이 생기는데 옛날에는 비누 대신에 그것으로 머리

,

.

와 얼굴을 씻었다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전체의 문맥을 보고 후자의 설을 따랐

.

다 왜냐하면 나무 열매가 일년에 세 번씩이나 익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

.

セイボン

( 세이본 여기에 대해서도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세 번의 한국어로

):

.

해석하는 경우이고,7) 또 하나는 오키의 방언으로 모쿠로지의 열매를 나타내는 말로

. 해석하는 경우이다 여기에서도 후자의 설을 따랐다

.

ハイベンタイベンソウベン (

하이벤타이벤소오벤 혹자는 이를 해변에서 큰 배 작은 배에서

):

,

주었다 라고 해석하고 있으나,8) 나는 그와 달리 이를 한국어로 보고 한번 두 번

,

,

세 번으로 해석하여 보았다 왜냐하면 나무열매를 줍는 곳을 해변보다 산으로 설정

.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ハレバメ ( 하레바메 하룻밤에를 일본어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

):

.

プリホク ( 뿌리호쿠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양을 나타낸 말로 추정

):

ムリトン ( 무리통 물동이를 일본어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

):

.

トガチ

(

토가치 이는 오키의 방언으로 작은 항아리라는 의미

):

ドナベ

(

도나베 이는 점토로 구운 남비

):

土鍋 (

) 를 의미

.

ソメ

소매(

):

이는 곡식을 헤아릴 때 한섬 두 섬 세 섬 할 때의 섬에 해당하는 말로 추

,

,

정.

サン (

산

):

山

을 가리키는 말로 산만큼 많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 추정

,

クド

쿠도(

):

경상도 방언에서 아궁이를 나타내는 구덕을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

シリキ

(

시리키 떡을 찔 때 사용하는 시루를 가리키는 말

):

ヨンギ

(

욘기 한국어의 연기를 일본어로 표기한 것

):

タライ

(

타라이 달다는 한국어에서 변화된 것으로 추정되나 편의상 여기에서는 맛있다로

):

해석했다.

シトギ

(

시토기 오키에서는 지금도 홍백의 작은 떡을 시토기 또는 시토기 떡이라 하여 집

):

을 신축하거나 배를 새롭게 축조하였을 때 대중들에게 그것을 뿌리며 축하하는 풍속

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토기는 홍백의 떡을 가리키는 말로 추정이 가능하다

.

.

이러한 낱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위의 노래를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다.

이어서 두 번째의 떡방아 노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노래에 대해서도 절구의 노래

.

와 마찬가지로 읍장의 집안에서만 전해지는 특별한 노래라고

伊未自由來記

는 말하고 있

다.

サンヤク

( 산야쿠

):

山 藥

의 을 줄인 것으로 마 를 가리키는 말임

薯 (

)

.

タイママヤイ

(

타이마마야이 아직까지 정확한 의미는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

伊未自由來

記

에 의하면 고대에 만든 경단의 재료로 대밥 메밀잣밤나무의 열매

,

椎實 (

),

칡가루

(

葛粉

),

백합뿌리 산딸기 누룩 소금 등을 섞어 절구로 찧는데 분량은 모르겠다고

,

,

,

,

하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구절의 말도 경단에 사용하는 재료를 열거하는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9) 그리하여 타이는 한국어의 대 에 해당되는 말이라고

)竹

(

추정된다 즉 가 와 로 변용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마는 오

ㅐ ㅏ ㅣ

.

,

.

키의 방언으로 밥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한국어 대와 밥을 의미하는 오

.

키 방언이 합해진 말로 해석이 가능하다 즉 대밥인 것이다 콘도우씨에 의하면 대

.

,

.

밥은 대숲의 대나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잡목림에서 자생한 대나무 열매는 쌀

같이 생겼는데 그것을 먹으면 조금 단 맛이 난다고 한다

,

.10) 따라서 타이는 대나무,

마마는 그 열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야이는 병렬을

.

나타낼 때 사용하는 일본어 야를 길게 발음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 뒤에

.

계속 경단의 재료가 되는 산딸기와 메밀잣밤나무의 열매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タライ

:

달다는 의미의 말 여기에서도 맛있다로 해석

.

.

トキカリ ( 토키카리 경상도에서 자주 쓰는 떡깔리 즉 떡가루를 가리키는 말

):

,

.

.

キダリシヤウ (

기다리샤우 기다리시오라는 한국어에서 변용된 말로 추정

):

이렇게 해석하여 이상의 노래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마지막으로 자장가의 가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노래는 앞에서 본 절구노래와 떡

.

방아 타령과는 달리 오키섬에서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노래라고 한다.

アチメ

(

아치메 아침에를 일본어로 표기한 것

):

ナリ (

나리 날이를 일본어로 표기한 것

):

ネエリチョンナリタアト (

내에리쵼나리타아 내일은 좋은 날이다라고 한국어로 해석

):

チャアシャ (

. 쨔아샤 잘자라는 의미의 말

):

アドリ

(

아도리 아들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

):

.

サンコク

( 산코쿠

):

山谷

,

즉 산골을 나타낸 말로 추정

,

ケンチャアナ (

켄챠아나 한국어의 괜찮아의 일본식 표기로 해석

) :

ボエリゃ ( 보에랴 호에랴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두 가지 표기가 있었다 하나는 보

):

.

.

에랴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호에랴이다 전자는 한국어에서 보이겠느냐는 의미에서

.

,

「

보이랴 보일까 로 해석할 수 있고,

」 「

」

  1. 또 호에랴는 오키의 방언으로 울면 이라는

「

」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12) 그런데 전체의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후자의 것이 훨씬

자연스럽기 때문에 후자의 설에 힘을 실었다.

ドングリズニ

(

톤구리즈니 오키의 방언에서는 둥글고 큰 눈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또

):

,

숫소의 눈이 크고 둥글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의미가 불분명한 낱말을 한국어와 오키의 방언으로 해석하여 한국어로 옮기

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오키에서 가장 오래된 전설적 역사서라 할 수 있는

伊未自由來記

에는 고대

한국인의 이주전설과 한국어와 오키의 방언이 뒤섞인 민요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엇 때문

일까 이는 그만큼 오키와 한국과의 관계가 긴밀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

?

이라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오키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799 ( 년

延歷

에 있었던 발해로 보내는 사신의 일행이 오키에 표류한 사

日本後記 ( 건이었다 그에 대해서 일본후기

.

)

. 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일본인들도 해상루트를 통하여 한반도와 대륙으로 드나들 때 오키는 중

요한 섬이었다 발해를 다녀오는 카모마로의 일행이 방향을 잃고 헤메고 있었을 때 히나마

.

( 지히메

比奈麻治比賣 ) 의 불빛을 보았다는 것은 당시 해상을 오고가는 배를 위해 설치한 등

대불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훗날 민간신앙과 결부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 불은 비단 외교사

.

.

절단뿐만 아니라 장삿배와 어선들이 이용하였음을 지역민의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

이다 발해사가 표착할 수 있었던 것도 오키가 가지고 있는 지리적 여건에서 발생한 것임은

.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고대 일본인들이 한반도로 건너갈 때 오키섬을 들러거나 아니면 오키섬을 지표로

삼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것을 전설로 입증을 하여주는 것이 신공황후의 전승이다 신

.

.

공황후는 삼한을 정벌하였다고 전하여지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그녀에 관련된 전승이 오키

.

, 에서도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잠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즉

.

,

이상의 내용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이 설화는 위의 견발해사 카모마로의 표착전설과 매

우 흡사하다 그들이 비록 풍랑을 만나 오키에 들리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나 카모마로는 귀

.

국길에 오키에 들렀고 신공은 한반도로 갈 때 들렀다는 것은 그 만큼 고대에 있어서 일본

,

해를 통하여 한반도와 대륙을 오고 갈 때 교통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그 전승들의 배경 속에는 오키를 통하여 한국으로 왕래하는 루트가

?

,

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실제로 국문학자 소재영은 오키의 지명이 한국의 지명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 첫째로 오키라는 지명이다 이는 경상북도 영일현의 옛 이름

.

.

斤烏支

와

, 도 결부되는 데 즉 은 큰 에서

“ ”

斤

,

烏支 都祈 는

( 야 의 오칭인 욱기 (

“

)

郁祈

)”

와 어원상 일치

하고 이는 다시 그것이

知夫里 ( 億岐 隱岐 ) 와 일치하다는 것이며 둘째는 오키의 지부리 , ) (

라는

지명도 한국과 관련이 있다는 지적이다 삼국사기 의 지리지 에 의하면 현재 언양을 지불

.

「

」

(

本知火

) 이라 했고 경상도 지리지 에는

,

古之居火縣 “

”

이라 하였으니 오키의

知夫里

가 신라

의

知火里

와 일치한다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학자

關周一

( 은 고대와 중세 때 일본해에는 미시마

見島 )

또는

隱岐島

를 매개로

山陰地方

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한일도항의 루트가 있었다고 추정한 바 있다.

그리고 일찍부터 우리나라의 독도에 와서 어업을 했던 사람들도 오키 사람이었다 이처럼

.

오키는 국경의 섬이었지만 일본해와 동해를 연결하는 교통과 어업에 있어서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한편 오키는 한국인들이 표류하기 쉬운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실제로 오키에는 한국에서

.

표류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함경도 함흥사람의 표류

.

이야기이다 옛날

.

五箇村

의 바다 어귀에 함흥사람이 표류해 왔다 그는 배를 만드는 목수이

.

어서 오키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배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이를 오키 사람

.

들은 계승 발전시켜 카나기 칸코 라는 오키의 독특한 조선기술을 개발하였다는 것이다 여.

「

」

기에서 말하는 칸코라는 말은 함흥을 가리키는 일본어라 한다.17) 이러한 전승은 우리나라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면 해류에 휩쓸려 오키의 해안에 도착하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

다.

실제로 그러한 예는 문헌상으로도 확인이 된다 그에 관련된 기록은 세기 무렵부터 보

17

.

이기 시작하는데 그 첫 예가

1664 (

년 현종 에 있었다 당시 전라도 흥향현 훈련도감 소속

.

船人 金禮生

등의 처자 명이 전라감사에게 진정서를 내어 그들의 남편들이 지난 해 월

19

8

( 경상도 영해

)丑山浦

로 어물을 매득하러 배를 타고 나섰다가 돌아오는 도중 행방불명이 되

었으므로 생사를 확인해줄 것이며 혹시라도 일본에 표착했다가 살아오는 경우에 정상을 참

,

작해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그들은

.

1663 ( 년

寬文

  1. 11

월 일 오키에 표착

4

했고 일본의 관헌에게도 그러한 사실을 자백했다

,

. 1664

년 월 대마번 표차왜

5

橘成重

에 의

해 무사히 송환되었다.18)

그 이후 오키에 표착한 예가 수 없이 발견되어진다 가령

.

1750

년 월 일에는 경상도

10

16

장기사람 명이 오키의

4

別府村 內耳浦 의

에 표착했으며

, 1783

년 월 일에는 경상도 영일

3 20

사람 명이 오키의

10

周吉郡元屋村溱

에 표착한 바가 있다 그리고

.

1784

년 강원도 통천사람

9

명이 같은 곳에 표착한 적이 있는데 이들은 강원도가 흉년이 들어 곡물을 싣고 평해로 가

,

던 도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1820

, 년 월 일에는 강원도 삼척 사람 명이 오키의 쿠니카에 표착했는데

10

17

11

이들은 월 그믐 경상도 울산에 가서 소금을 사서 돌아가던 중 월 일에 표류하여 일

10

12

8

5

후 오키에 표착했던 것이다

. 1820

년 월 일에도 전라도 영암 사람 명과 강원도 평해

11

4

6

사람 명을 태운 배 한 척이 오키의

2

仲田

에 표착했는데 이들은 쌀을 싣고 강원도 평해로

,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표류하였다 한다

. 1827

년 월 일에도 울산사람 명이 오키의

12

3

8

海

士郡 二子岩

에 표착했는데 이들은 부산으로

,

貢米

를 싣기 위해 갔다가 월 상순 기장을 출

3

발해 돌아오던 도중 표류하게 되었다 했다

. 1830

년 월 일에는 울산사람 명이

11

10

6

島前

의

知夫里郡 別府村 耳浦

에 표착했는데 이들은 월 하순 강원도 양양에서 소금을 팔고 함경도

9

,

함흥을 향해 가기 위해 월 일 양양을 출발하였으나 표류하다가 오키에 도착했다는 것이

11

1

다 그리고

.

1834

년 월 일 경상도 영해 사람 명이

10

10

5

島前 知夫里郡 細浦

의

에 표착했는

데 이들은 울산에서 소금을 싣고 돌아가는 도중 월 일에 표류하여 오키까지 떠밀려 오

10

3

,

게 되었다 한다

. 1852

년 월 일에는 전라도 장흥 사람 명이 오키의

9 6

9

福浦

에 표착했다 그

.

들은 월 일 건어를 경상도 장기에서 사 가지고 돌아가던 도중 표류하여 오키에 표착했던

8

7

것이다 또

.

1856

년 월에도 전라도 흥양 사람 명이

11

8

赤灘

에 표착한 일이 있는데 이들은

,

강원도 평해에서 건어를 구입하여 돌아가다가 표류하여 오키에 오게 되었다 했으며, 1867

년 월 일 경상도 영일 사람 명이

10

17

6

知夫里郡 美田村

에 표착하였는데 이들은 강원도 삼

,

척에 가서 곡물을 싣고 돌아가던 도중 표류하다가 오키에 표착하였다 한다.19)

이처럼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표류하다가 오키에 표착한 어민들이 수없이 많다 오키 사람

.

들에게 조선기술을 전수한 함흥 사람들처럼 기록으로 나타나있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오키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고국으로 송환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

,

이다.

그런데 그들의 표착한 지역이 그 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것은 다름 아닌

島後

의 경우는 서쪽 해안 그리고

,

島前

의 경우는 서쪽 해안과 우리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북쪽 해안에 집중적으로 몰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목엽인으로서 차로 도착

1

.

한 곳을

島後 伊後 의

서쪽 포구라고 하고 차적으로 도착한 곳이

, 2

長尾田

, 3

차적으로 도착

船越 ( 한 곳이 후나고시

) 이다 이들 지역 모두

.

島後

의 서쪽 해안과

島前 西島

의 북쪽에 위치

해 있다 더군다나 견발해사가 표착한 곳도

.

島後

의 서쪽 해안이고 신공황후가 들렀다는 곳

,

도

島後

의 서쪽 해안이다 이처럼 역사적 기록과 일치한다는 것은 그만큼

.

伊未自由來記

의

목엽인의 이주전승이 결코 함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오키의 서북쪽은 한국의 동해안과 일본의

山陰地方

을 연결하는 해상루트

를 가지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한국인들이 표착한 지역이다 오키에 있어

.

.

서 최초의 주민이었던 목엽인들이 도착했던 곳도 서북쪽 해안이고 또 그들이 신라인이며

,

그들이 남긴 노래 속에 한국어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伊未自由來記

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

伊未自由來記

는 오키의 향토사이자 고대 한국인의 이주

사이기도 한 것이다.

콘도우씨의 안내로

五箇村

( 나고다

名尾田

) 라는 작은 포구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

.

해안에는 한국의 동해안에서 떠내려온 쓰레기로 가득했다 심지어 그곳의 어느 가정에서는

.

한국에서 떠내려온 물탱크 건져 긴요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 마

.

을에서는 자기 조상이 한국에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들의

.

증언은 국경이 확실치 않았던 시대에 있어서 바다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연결

시켜주는 열린 세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것을 문헌적으로 입증해주는 자료가 이번의

伊未自由來記

였다고 보여진다 그것.

을 통하여 오키의 초기 정착민들은 신라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훗날 일본본토에

,

海人族 ( ) 서 들어온 아마족

들과 함께 어울려 오키를 개척해 나갔으며 그 결과 이상과 같은

,

세 개의 민요를 남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

伊未自由來記

에 대한 역

. 사적 고증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난 한국어 역시 완벽하

게 밝혀진 것이 아니다 앞으로 여기에 대해 전문가들에 의한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져야 할

.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일본의 각 지역에는

伊未自由來記

와 같이 한국과 관련된 자료들이 창고

속에서 잠들어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앞으로 그러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

.

고 하나씩 발굴하여 정리하고 소개하며 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베일에

.

가려진 한일관계사를 보다 명확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이 될 뿐만 아니라 지역과 지역 간의

교류를 등한시했던 우리의 역사관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의미 깊은 일이 될 것임에 틀림없

다.